《악속할게 -下-》
by 두냐후
무츠노카미는 평소의 차분한 행동거지와는 전혀 딴판인 씩씩한 태도로 그의 옆에 털썩 앉아버린 그의 주인을 의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고 있는 건 분명했지만 그 이유를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배고프지 않아? 고구마라도 구워먹을까? 아님, 옥수수? 아, 그러고보니 수박도 있는데!"
침묵을 메우려는 듯 빠르게 말을 하는 아게하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무츠노카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도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그것도 늘 혼마루의 도검남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의 주인이 먼저 다가와서 위로를 해주고 기운나게 해주려고 고민할 정도로.
"거 뭐가 입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구랴. 뭐 마실 건 없어라?"
"마실거? 어, 음… 막걸리는 어때? 혹시 막걸리 마셔본 적 있…어?"
아게하가 잠시 고민한 뒤에 조심스럽게 입에 올린 술의 이름을 들은 무츠노카미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니 아무래도 일본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술인 듯했다.
"마셔본 적은 없구마. 있으믄 맛 봐도 쓰것소?"
다른나라의 술을 맛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미가 동한 무츠노카미가 아게하를 바라보자 아게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론이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금방 가지고 올게!"
◈
잠시 후에 싱글벙글한 얼굴로 부엌에서 술병을 들고 돌아온 아게하는 무츠노카미의 손에 쥐어준 술잔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주었다.
"자, 마셔봐.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그럼…"
술잔에 담긴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킨 무츠노카미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를 바라보는 아게하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술맛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좀 약한 술이그마, 근디 시언하고 단맛이 좋구먼."
"맘에 들어?"
"이 더운 여름에 잘 맞는구마. 허허… 기분 좀 풀리것소."
"다행이다."
"…주인아씨도 한 잔 허시겠소?"
자신의 대답에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으로 미소짓는 아게하를 바라보던 무츠노카미는 무심코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까지 아게하가 술을 입에 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의 주인이 술을 안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지만, 아게하는 그저 무츠노카미가 자신에게 술을 권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을뿐 이내 생긋 웃으면서 그가 내민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럴까나~? 원래 술은 잘 안하지만 모처럼 무츠노카미가 권해주는 거고. 그럼 잘 마실게."
"그라믄 한잔 받으소."
쪼르륵-.
오늘 따라 조용한 본성의 마루에 막걸리가 술잔에 따라지는 소리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따스하고 느긋한 지금의 분위기가 어쩐지 간질간질해서 무츠노카미는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히어멀건게 이쁘기도 허구마. 술 빛깔이 말이여."
무츠노카미의 말에 술잔을 홀짝이던 아게하는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난 항상 이게 쌀뜨물이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푸흡."
아게하의 직설적인 대답에 무츠노카미는 웃음을 터트렸다.
전 주인인 료마의 곁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여인네들의 모습을 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주인인 아게하는 다른 시대의, 다른 나라 사람인 탓일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해서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뭐야―.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우스워?"
옆에서 아게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무츠노카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손사래를 쳤다.
"아녀아녀, 그게 아니라. 거 어쩐지 쌀로 맨들었는가 싶구먼. 허긴 좋은 술은 쌀로 맨든게 많지라."
"그야 쌀은 매 끼니마다 먹을만큼 중요한 거니까, 그걸로 술을 만들면 당연히 좋은게 나오겠지?"
"암, 거 말되네 그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아까와 같은 느긋하고 편안한 정적 속에서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무츠노카미는 이런 기분에는 조금쯤 익숙해져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기분도 좀 풀려부렀소. 좀 웃으며 살아야제. 울믄 혼마루 아그들이 뭐라고 생각허것소."
새삼 결의를 다짐하는 듯한 말에 아게하는 그저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할 뿐이었다.
"헤헤헤, 나중에 또 울적해지면 내가 같이 술 마셔 줄게."
그 말이 마치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츠노카미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손을 뻗어 아게하의 뺨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참으로 감사하구마. 주인아씨는 속이 증말 좋은 사람이어라."
이렇게나 상냥한 사람이다. 지금 그의 주인인 아가씨는.
그러니 당장은 그의 친구들이 곁에 없더라도 괜찮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