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따라 찌뿌드드하니 검푸른 구름이 밤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지로타치에게 한 병 얻어온 술이라도 마시면서 달구경을 할까 했던 운치 있는 계획이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구름에 화를 내 무엇하랴. 인생도 도생(刀生)도 언제나 잘 풀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때, 저만치에 뭔가 희끗한게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씨? 이 시간에 뭣 허는겨?"
연못 너머, 혼마루에 낀 엷은 밤안개 속에서 흔들리는 하얀 그림자는 분명히 아게하의 것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위태위태 걷고 있는 모습에 무츠노카미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구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겨울은 아니라 해도 밤바람이 찬데, 하다못해 겉옷 한 자락이라도 당장 달려가 뒤집어씌워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갑자기 아게하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소리없이 혼마루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틈새로 빠져나가 버렸다.
"어이구, 아씨,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간당가?!"
닿을리 없는 소리를 높이며 무츠노카미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정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 시간에 아게하가 혼자서 밖에 나와있는 것부터 이상했지만, 그 차림 그대로 밖에 나가다니 명백히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아게하는 아까부터 전혀 주변을 둘러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실로 묶어 잡아당기고 있는 작은 돌멩이처럼,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어두운 길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츠노카미가 몇 번인가 그녀를 불렀지만 아게하는 뒤를 돌아보는커녕, 오히려 평소의 그녀에게선 전혀 볼 수 없던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혼마루가 보이지 않는 거리로까지 들어왔다. 아게하가 사라져 버린 어두운 십자로에 무츠노카미는 홀로 서서 숨을 헐떡였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여유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아씨, 어디 있는겨? 들리면 대답혀!"
불길한 예감이 무츠노카미를 엄습했다.
어두운 골목, 소리를 내는 것을 전부 죽여버린 듯한 기분 나쁜 고요함. 유달리 빛을 잃어버린 밤하늘. 무츠노카미 요시유키의 몸은 이 불온한 분위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그렇게 무츠노카미는 자신을 향해 되뇌었다.
그 때, 아게하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악!"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무츠노카미는 굽이굽이 꺾어진 골목을 순식간에 달려나갔다. 마지막 골목을 꺾었을 때, 무츠노카미는 이성을 놓아버릴 뻔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대여섯 명의 그림자.
흉흉한 기운과 피의 냄새는 시간역행군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것이었다. 인간의 육체와 의상을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그 몸 여기저기를 찢고 튀어나온 요사스런 빛의 해골은 감출 수 없었다. 저마다 칼을 뽑아든 그들 무리에게서 피에 굶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닥에는 한 여인이 나뒹굴고 있었다. 간신히 숨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는 사지와 넘어지면서 먼지에 엉망이 된 얼굴. 간신히 고개를 들려는 그녀의 등 뒤로 자객 중 한 명이 칼을 치켜들었다.
탕.
자객의 칼은 그 주인의 몸뚱아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리볼버 탄환이 정확히 미간을 꿰뚫었다. 패거리 중 한 명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자 다른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무츠노카미가 더 빨랐다.
"에에잇!"
아게하의 바로 곁에 서 있던 두 자객을 무츠노카미가 발로 걷어찼다. 적들은 중심을 잃고 무너져 벽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그것들에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츠노카미는 아게하를 안아올렸다.
"괜찮은겨?! 아씨! 정신 차리어! 나여, 뭇츠여! 제발 대답혀!"
아게하의 몸이 흔들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안아든 남사를 올려다보았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게하는 죽지 않았다. 다만 쇼크로 정신이 혼미해진 것뿐이리라. 그녀의 팔에서는 계속 축축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츠노카미와 간신히 맞추고 있던 시선도 흐릿해져 허공을 더듬었다.
무츠노카미는 아게하를 고이 바닥에 눕혔다. 곧 그는 몸을 일으키며 총을 총집에 집어넣고는 허리에 찬 본체, 우치카타나 「무츠노카미 요시유키」를 뽑아들었다. 어디에서 비쳐든 것인지 모를 가느다란 빛에 칼날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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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무츠노카미가 아게하를 쫓아 뛰어나가는 것을 본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헤시키리 하세베와 하카타 토시로가 골목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어째 다들 그렇게 느려터진겨!?"
혼마루 제일의 기동을 자랑하는 하카타와 하세베가 느렸을 리 없다. 다만 무츠노카미의 마음이 더 다급했을 뿐이었다. 평소 사람 좋은 무츠노카미가 눈이 뒤집혀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하세베도 하카타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목에 적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군데군데 굴러다니는, 한때는 칼이었던 철 토막과 채 먼지로 흩어지지 못한 적들의 해골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는 것이여!? 아씨가 다쳤어어! 당장 모치즈키든 코히바리든 데려오지 않고 뭣 허는겨!"
"진정하쇼잉, 이런 시가지에 말은 못 들어온당께. 워어이고, 피가 무지하게 났구마잉!"
"당장 혼마루로 귀환한다. 어이,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주군을 업어 모셔가야겠으니……"
"나가 데려갈 것이니 건드리지 말어!"
아게하를 안아든 무츠노카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하세베는 아주 잠깐 눈썹을 찌푸렸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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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깨어났다. 대장, 정신이 들어?"
"아이고, 다행이구마잉! 안 일어나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당께!"
혼마루 천장 아래서 아게하는 눈을 떴다. 시야에 도검남사들이 하나 둘 얼굴을 디밀어왔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어쩌다 이런…… 약을 다시 바르는 게 좋지 않겠어?"
"기력을 회복해야지,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다들 잠깐만 조용히 해 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와와 쏟아진 말에 아게하가 머리를 짚었다. 그제서야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남사들이 조용해졌다. 한숨을 내쉬던 아게하는 갑자기 한쪽 윗팔을 찢는 통증에 몸을 움찔했다. 손을 올리자 옷소매 아래로 거칠거칠한 붕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칼날이 팔을 스친 모양이야. 출혈이 심했지만,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냐. 푹 쉬면 아물 테지만, 한동안 무리하지 마."
"고마워, 야겐. 그런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건 우리가 묻고 싶어. 대체 왜 혼자서 밖에 나간 거야?"
아게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쌓여있던 편지들 중 하나를 뜯어 읽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는 기억이 애매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한쪽 팔을 칼이 찢은 후였었다.
그런 그녀의 눈을 조심스레 살핀 이시키리마루가 한숨을 쉬었다.
"요술에 홀렸던 모양이구나. 적의 소행이겠지."
"제길, 이런 수를 쓰다니…… 이쪽에서도 앞으로 더욱 경계에 만전을 가해야겠군."
"다들 미안해, 나 때문에 이 밤중에."
앉은자리에서 아게하는 고개를 숙였다. 남사들은 저마다 신경쓰지 말라고 하거나 아게하가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다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해 왔다.
미소로 화답하며 방 안의 남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눈길을 주던 아게하는 문득 눈치를 챘다.
"뭇츠는 어디 있어?"
"무츠노카미 요시유키는 혼마루에 귀환한 직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세베의 대답에 아게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흐릿한 기억 중에도 뭇츠의 목소리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 생각을 지우지 못하며 아게하는 남사들을 방에서 물렸다. 그들은 아게하에게 말을 남기거나 서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의논하며 하나 둘 방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하세베가 방문을 닫고 멀어지자, 아게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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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속의 장기가 전부 오그라드는 느낌. 얼음으로 된 침이 등골을 찌르는 서늘함.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끈덕지게 머릿속에 달라붙에 오는 검은 그림자. 도장을 만드는 방 한구석에 웅크려 앉아, 무츠노카미는 덜덜 떨고 있었다.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회한이 밀려들어 그를 괴롭혔다.
사카모토 료마가 살해당한 것도 방금 전처럼 어두운 밤거리였다. 암살로 잃은 전 주인, 그 사실에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료마가 사라져간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단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 무츠노카미는 뼈저리게 느꼈다. 적의 칼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게하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난 것은 공포, 그리고 무력감이었다. 전 주인의 이름을 되뇌며 무츠노카미는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료마… 내는, 또 실패하는겨?"
료마의 얼굴과 아게하의 얼굴이 겹쳐졌다. '소란피우지 말어,' 그런 말을 하고 죽어간 료마. 만약 그 말을 아게하가 했다면……. 내장이 저며지는 듯한 아픔에 무츠노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 있었구나, 뭇츠."
그 때 등 뒤에서 아게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퐁퐁 두드리는 손바닥에 무츠노카미는 벌떡 일어나 아게하를 꽉 붙들었다.
"아씨, 괜찮은 거여? 치료 받았어? 상처는 워뗘? 혹시 독 같은 거에 당한 건 아녀?!"
"지, 진정해, 뭇츠! 일단 손에 힘부터 풀어 줘, 거기 다친 곳이야"
"으억, 미, 미안혀."
무츠노카미는 한쪽 팔의 힘을 풀었다. 아게하는 부드러이 미소지었지만, 그 표정마저도 지금은 어쩐지 곧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살짝 스친 정도야. 뭇츠가 구해준 덕분이야."
"정말이여? 참말로 괜찮은 거여?! 사실은 치료가 안 되는디 내 달래려구 하는 말은 아니여? 진짜로, 진-짜로 그냥 스친 상처인 거여?"
"응, 정말로, 참말로, 진짜로 괜찮아. 뭇츠, 너무 호들갑……."
갑자기 아게하가 말을 멈췄다. 그 공백에 무츠노카미는 한층 심장이 요동쳤다. 지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 시선이, 떨리는 열 개의 손가락 끝에 확실히 느껴지는 체온이, 지금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이 견딜 수 없었다.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안 되는데, 이 이상 앞이 흐려지면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데.
그 때, 갑자기 따뜻한 한 쌍의 온기가 무츠노카미의 뺨을 감쌌다.
"난 죽지 않아. 뭇츠, 네가 날 구해줬어."
아게하가 말했다. 그녀의 온기를 나눠받아서일까,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게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야 비로소 무츠노카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정말, 내가, 구한 거여? 아씨는, 살아있는 거여?"
울먹이는 무츠노카미를 아게하는 한동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무츠노카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쪽. 귀여운 소리와 보들보들한 감촉이 입가를 간지럽혔다. 무츠노카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어두운 중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아게하는 의연히 말했다.
"따뜻하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뭇츠."
가슴에 따뜻한 것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감정이 북받친 무츠노카미는 충동에 몸을 내맡겼다. 그는 아게하를 담쏙 껴안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남사는 주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꾸욱 겹쳤다.
"읍, 응… 뭇… 츠…… 으응……!"
"아씨… 아게하 아씨… 따뜻혀… 살아있는 거, 맞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술이 각도를 바꾸어 가며 맞물렸다.
산소를 탐해 아게하가 살짝 입을 벌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무츠노카미는 그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보드라운 혀가 부끄러움을 타듯 살짝살짝 물러나는 것을 몇 번이고 휘감아 더듬었다. 그 귀여운 움직임과 촉촉함 전부가, 무츠노카미 자신이 구해낸 소중한 이의 것이었다.
문득 아게하가 무츠노카미의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아쉬워하며 천천히 무츠노카미가 입을 떼자 아게하가 헉헉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무, 뭇츠, 길어……."
"미안혀, 아씨. 너무 좋아서 그만 제때 못 끊었여."
"뭇츠도 참."
아게하가 까르르 웃었다. 무츠노카미는 멋쩍이 웃으며 아게하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렸다.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어루만지자 아게하가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미소지었다. 아직 상처가 아플 텐데도 당당히 웃어주는 모습이, 그러면서도 발갛게 상기된 귀여운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무츠노카미는 그대로 아게하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달콤한 체취가 풍겨왔다. 아게하가 조심스레 그의 머리를 꼬옥 눌러왔다.
"후후, 뭇츠, 강아지 같아."
"강아지는 이런 건 안 할 틴디?"
무츠노카미가 스윽 손을 움직였다. 등의 곡선을 직접 어루만지는 손길에 아게하가 등을 빳빳하게 세웠다.
아게하는 등의 피부조차도 부드러웠다. 온몸에 비단을 두르고 자라난 건 아닐까 상상하며 무츠노카미는 조금 더 대담하게 손을 움직였다. 허리의 곡선을 덧그리자 아게하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츠노카미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부비다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빨개진 아게하를 올려다보며 무츠노카미는 입을 열었다.
"아씨….. 좀 더, 확실히 가르쳐주어."
"뭇츠…… 아……."
"상처는 안 건드릴겨. 경험은 없지만서도, 최대한 아프지 않게 노력할 거여. 그러니까… 부탁이여. 내를, 받아들여 줘."
최대한 폼을 잡아보고 싶었는데, 나온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아게하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헤맸다. 터무니없는 말을 해 버렸나 싶어 숨을 삼킨 그 순간, 그녀가 무츠노카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