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무츠노카미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주인인 아게하. 아닌게 아니라 창밖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거리의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무지막지하게 퍼붓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저 폭우에 흠뻑 젖어버린 옷 대신에 찻집 주인으로부터 빌려온 커다란 네마키를 몸에 두르고서 바깥의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있지,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은건데 서양 쪽에서는 이렇게 비가 내리는 걸 두고…"
그런 주인의 모습이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연약하고 무방비 해보여서 무츠노카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비를 피하기 위해서 그녀를 이 찻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남자를 따라서 같이 찻집에 오다니…. 무츠노카미는 주인의 안위를 책임지는 도검남사로서 아게하가 걱정이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주인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에도시대의 찻집이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지 까맣게 모르는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어떤 남자가 그녀를 찻집으로 불러낼 때를 대비해서 자신이 미리 주의를 줘야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순간 아게하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할 뻔했다.
"…라고 한대. ……뭇츠?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어… 듣, 듣고있어라."
순간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지만 아무래도 주인의 표정을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챈 모양이다. 그 얼굴에 또 괜히 찔끔해서 다시 머리를 말리는 시늉을 하고 있으려니까 아게하가 창가에서 몸을 떼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뭇츠, 아까부터 엄청 조용한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속눈썹이 한올한올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를 바라보자 무츠노카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아까 아게하가 내다보고 있던 창 밖으로 돌린 그는 갑자기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머리를 힘겹게 굴려가며 핑계거리를 찾았다.
"아니… 거, 비가 얼른 그치지 않으믄 난중에 돌아갈 때 큰일이지 싶어서…"
"그…건 확실히 곤란한데."
무츠노카미의 대답에 아게하도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밖에서 내리는 비의 양은 아까보다 한결 줄어들어 있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빗줄기가 가늘어지면 잽싸게 본성으로 돌아가자. 어쩌면 여기서 우산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암, 그라는게 좋겠소."
그 상태로 아게하와 함께 벽에 기대어 앉아서 말없이 방안에 울려퍼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밖에서 내리는 비를 지켜보던 무츠노카미는 이번에는 아게하가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옆에 앉아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쌓여온 피로가 몰려온건지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게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근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듯한 평온한 그녀의 얼굴을 본 무츠노카미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그의 주인은 다른 일은 빠릿빠릿하게 잘 처리하면서 이런 면에서는 헛점 투성이인 걸까. 비가 그치려거든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았기에 무츠노카미는 아게하가 계속 잠자도록 놔두기로 했다.
"어이쿠."
고개를 앞으로 꾸벅이며 졸던 아게하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무츠노카미는 살며시 아게하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잘거믄 이렇게 해두는게 더 낫겠지라. 내가 다른사람에게 요로코롬 어깨를 빌려주는 일은 없지만서도 아씨에게만 특별히 빌려주는 거여."
살과 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가끔 주인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 맡았던 낯선 꽃향기랑 익숙한 과일 냄새. 지금까지 남자 주인들 곁에만 있었던 그에게 있어서 여인네의 몸에서 나는 향기도, 곁에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것도 무척이나 생소한 경험이여서 무츠노카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잠든 아게하의 고른 숨결이 입술 위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무츠노카미는 당황하면서 원래 앉아있던 자세로 돌아갔다. 어째선지 얼굴이 뜨겁고 가슴 한 켠이 뻐근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