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안좋아서 일할 맛이 안난다는 핑계를 대며 미루어 두었던 서류작업을 큰 맘 먹고서 다 해치우기로 결심한 아게하는 읽고 있던 서류에서 모르는 단어를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읽을 줄 몰라서 서류작업을 할 때마다 우왕좌왕하며 근시들의 도움 없이는 서류작업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그녀였지만 그 동안 카센 카네사다의 엄격한 일본어 수업을 들으며 기른 일본어 실력과 같은 종류의 서류들에서 반복되는 문장들에 익숙해진 덕분에 요즘은 근시들의 도움이 없어도 서류작업쯤은 혼자서 해낼 수 있게 되었다며 뿌듯해 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하하, 그래. 인생이란게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지…."
"아씨 뭔 문제라도 있당가?"
혼자 툴툴거리면서 일본어 사전을 뒤적거리고 있으려니까 오늘의 근시인 무츠노카미가 방의 저 편에서 결제된 서류들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도' 근시인 무츠노카미라고 해야하나.
한동안은 제 1부대의 전력강화를 위해서라며 계속해서 무츠노카미에게 근시를 맡겨두고 있었지만 이젠 혼마루에서 제일 많은 경험을 쌓은 그를 여전히 근시로 남겨두고 있는 것은 순전히 아게하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가 근시가 아니였을 땐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서는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다.
혹시라도 계속되는 근시 당번에 무츠노카미가 싫어하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을 한 적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무츠노카미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여서 아게하는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그 대신에 가능한 근시인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사니와의 업무를 해내리라고 마음먹었다.
무츠노카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아게하는 그가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고서 그가 가리킨 글씨를 확인했다. 서류 구석에 조그맣게 적혀있는 건 그녀가 언젠가… 아니, 지난번 무츠노카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던 그 날에 무츠노카미의 말을 확인해보느라 도검남사들을 도파별로, 관계별로 분류해보느라 한글로 끄적어둔 도검남사들의 이름이었다.
근데 그걸 다른 곳도 아닌 서류 구석에다가 했었다니, 그 때 무츠노카미의 우는 얼굴을 봤던게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나보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라며 가슴을 쓸어내린 아게하는 무츠노카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게하로부터 서류의 글씨가 자신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둔 거라는 설명을 들은 무츠노카미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서류를 들여다 보았다.
"오호라~ 이것이 우리들의 이름이라 이 말이제? 어뜬게 나의 이름이여?"
"네 이름…은 이거야."
아게하가 서류의 구석에 적힌 이름들 중 하나를 가리키자 무츠노카미는 신기하다는 듯이 웃었다.
"흐미, 내 이름이 허벌나게 길어져부렸네?"
"한자가 아니라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그래. 여기 이 네모랑 작대기로 적힌게 '무'고 그 옆의 글자가 '츠'소리를 나타내는 거거든."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아게하의 설명을 듣던 무츠노카미가 불쑥 물었다.
"아씨의 이름은 어떻게 적는가?"
"어? 나, 내 이름? …어, 그러니까 종이가 어디 있더라."
생각지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해있던 아게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빈 종이를 찾기 위해서 책상 뒤적였다. 스스로가 참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츠노카미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바보처럼 얼굴 표정이 풀어지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기에 고개를 숙여 종이를 찾는 것에 집중하던 그녀는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감촉에 급히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게하와 눈이 마주친 무츠노카미는 씨익 웃으며 자시의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종이가 아까우니께 기냥 여기다 아씨 이름을 적어주소."
"……."
"아, 아씨 어디 아픈가?"
"아무것도 아냐… 잠깐 눈이 부셔서……."
잠시 책상에 얼굴을 박았던 아게하는 표정 관리를 마친 다음에 다시 머리를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정말 좋지만 또 한편으로는 심장에는 안좋다는 부작용이 있다는 걸 새삼 뼈저리게 느끼며 무츠노카미의 손을 잡은 아게하는 붓을 들고는 자신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양…은…ㅅ…까지 적은 그녀는 자신이 사니와로서 사용하는 가명이 아니라 본명을 적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지우고서 다시 적으면 이상하단 걸 눈치채겠지? 그래도 본명이랑 가명 둘 다 3음절인게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적고 붓을 내려놓자 무츠노카미는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글자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니께 이게 아씨의 이름 석자란 말이구만…."
본의 아니게 본명을 알려준 셈이 되어버렸지만, 한글 읽는 법은 모를테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아게하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